쉼없이 달려오다 무엇가에 차여 멈출 수밖에 없을 때가 있어.
해야만 되는 것들에 치여서 한치 앞만 보다가..
멈추어 서면 사방을 둘러볼 수 있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사람들은 하루를 이틀처럼 쓰라고 하더라.
그래서 한 때는 나도 열심히 시간을 체크하며
그렇게 열심히 하루를 살아냈었어.
오늘 하루 내가 한 일이 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에 맞아 정신을 잃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더라구.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지.
주위를 둘러봐도 이정표 따윈 없었어.
참 이상하지?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이정표를 따라서 길을 걸어 왔거든?
근데 거기 딱 떨어져 놓여 있을 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울고만 있었지.
온통 깜깜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어.
그러다 조금씩 주위가 환해지며 무언가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
뺨을 훑고 지나가는 차가운 공기, 미세하게 흔들리며 반짝거리는 나뭇잎들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지니 아무 생각이 안나더라고
태어나서 막 눈을 뜬 아기처럼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게 되더라.
어렴풋이 잊고 있었던 기억이 조각조각 생각나기도 하고..
정신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로 머릿속이 꽉차
오늘 내가 뭘 먹었는지, 뭘 봤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에 따라 익숙하게.. 반복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이 모든 게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어차피 어디로 가야될지도 모르겠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몰라서
일단 에라 모르겠다 나무들 사이로 걷기 시작했어.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내가 살아온 날들이 하나 둘 떠오르더라고
신기한 게 내가 간절히 바랐던 목표와 그걸 이루기 위해 해온 무수한 일들은
정작 잘 기억이 안나는 거야..
반복적으로 했던 일들..
예를 들면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던 것.
처리해야 될 업무, 문서들...
대신에 드문드문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건
어릴 적 조심스레 머리를 감겨주던 아빠의 손길
나와 죽이 잘 맞던 친구의 환한 미소
남몰래 눈물을 닦으시던 엄마의 모습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아이들
사람들과 나눴던 즐거운 대화
고요한 호수에 금빛으로 반짝였던 물비늘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던 석양의 색
진짜 웃긴 게 정작 내가 했던 '일'들은 기억이 안났다는 거지.
자연 또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느꼈던 감정과 그 때의 이미지.
그게 먼저 기억나더라.
내가 어떤 걸 할 때 가장 행복했더라... 생각해보니
놀이터에서 모래 만지는 게 즐거웠고,
도대체 이 세계는 왜 생겨났는지 뜬금없이 질문을 던져 생각할 때가 좋았고,
찰나의 생각과 느낌을 그려냈을 때 행복했고,
음악을 듣거나 피아노를 치며 감성에 젖을 때도 황홀했고,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가 되는 느낌도 참 좋았어.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저기 누군가가 서 있더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가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희미하게 보이더라.
근데 정말 희한한 게 왠지 나를 보는 듯 닮은 사람인 것 같았어.
그가 나에게 물었지
이정표를 찾았니?
아...
어느덧 나는 길을 헤매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던거야.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라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남이 알려준 수많은 이정표 대신
오롯이 혼자 찾아낸 방향대로 살아야겠다는 것.
혹시라도 언젠가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시 멈춰지게 되었더라도
너는 너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을거야.
인생의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오히려 진짜 내 삶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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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브런치에서도 발행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artistna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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