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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결혼, 사랑이라는 지난한 합의의 과정/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by artist_nao 2017.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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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제나 흥미롭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특히 낭만적 사랑(이성 간 혹은 동성 간 일수도 있는)은 늘 관심을 끄는 주제이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 책이라 매우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한 커플의 만남과 사랑, 연애와 결혼, 육아까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점이 인상적이다.

 



1. 만남

 

낭만적인 '사랑의 시작'은 보통 극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다른 사람이 영혼의 짝이라는 느낌, 이 확신은 아주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다. ... 직관, 즉 이성의 정상적 작용 과정을 건너뛰기에 더더욱 정확하고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만 같은’ 자발적인 감정이다.


이 확신의 순간을 묘사한 글귀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밀란 쿤데라의 '우연의 새가 어깨 위에 내려앉을 때' 이다.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는 둥, 후광이 비친다는 둥 다소 과장되고 유치할 수 있는 표현들이 관대하게 허용되는 바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갑자기 찾아온다. 순도 100%의 낭만적 '감정'으로 발생한 확신에는 이성적 판단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별한 느낌은 상대가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에 눈이 멀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치명적 결함들을 그냥 지나친다. 이 때문에 운좋게 연애로 이어지더라도 성격과 취향의 차이로 이별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젠 사랑을 믿지 않을 거라며 자위해도 언젠가 또 그런 감정에 빠질 수밖에.

 

 

그나마 이런 감정을 비교적 쉽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느낌'이 안와서 제 짝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도 비일비재하다. 머리는 나와 잘 어울리는 상대라고 하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쨌든 '이성' '감정'의 적절한 조화로 빚어진 만남이 힘든 건 사실이다.

 

 

 

2. 연애, '소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미적 거리

 

드물고도 진정한 친구와 함께 평소의 방어기제를 아무 문제 없이 벗어던지고, 극도로 친밀해지고 서로 용인되고자 하는 갈망을 공유하고 충족시키는, 막간의 짧은 유토피아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대일로 친밀해진 관계 속에서 우리는 다른 이에게는 보이기 힘든 서로의 약점을 내보이며 안정감을 얻는다.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며 '상대가 오로지 내 것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낀다.

 

작가는 '사랑과 섹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자유사상가들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만 영원히 섹스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서로 헌신을 약속한 사람들만이 함께 탁구를 치거나 조깅을 할 수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부조리하다고 결론짓는다... 우리 시대에 이 철학은 압도적인 차이 아래 소수자의 견해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행위'가 함께 탁구를 치거나 조깅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여겨지는 까닭은 이것이 보다 내밀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다른 이와의 공유를 바라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적, 정신적 거리가 매우 가까워지는 이 위험 부담이 큰 '행위'를 아무에게나 허용하지 않으며, 검증을 통해 안전이 확보된 한 사람에게만 행하고자 한다. 관계가 잘못되었을 경우의 후폭풍, 특히 내 자신의 몰락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신중하고 내밀하게 이루어지며, 관계가 안정된 궤도에 오르면 이 행복감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래 지속되길 원한다. 그러나 어렵게 만들어진 관계는 너무도 불안정하다. 흥분과 권태, 그 사이의 어느 한 점을 잡아 균형을 맞추는 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파트너와 적정한 미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혹은 소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군가를 만나고 연애까지 이르는 과정이 힘든 건 바로 '소유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요즘 말로 ''이라 부르는 관계를 힘들어하거나 혹은 즐기는 이유는 바로 '아직 상대방을 소유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서로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일대일 관계인 '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물론 결혼 전 연애 단계에서는 법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소유'가 아닌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사실 결혼이 '완전한 소유'를 보장하진 않지만)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감정이 식어 언제든지 관계가 파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관계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불안정이 싫어 '결혼'을 통해 관계에 대한 안정을 보장받은 커플들은 또 쉽게 권태를 느끼기 마련이니 이래저래 연애나 결혼이나 어렵고 힘든 건 마찬가지인 듯 하다.

 

 

 

 

3. 결혼, 사전 합의의 필요성

 

이상적인 혼인 서약 : 우리는 앞으로 몇 년 후에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행위가 우리 인생에서 최악의 결정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공황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것도 약속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불행에 이를 여러 경우를 조사했고 우리 자신을 결속시킬 사람으로 서로를 선택했습니다.

 

결혼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랑의 형태를 지향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진정 '일반적인 형태의 사랑(소유로 인한 구속)'을 원하는지 또 그것을 견딜 수 있는지 검열이 필요하다. 다자간 사랑을 뜻하는 '폴리아모리(polyamory)'는 일부일처제의 개념과 대치된다. 이는 파트너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람 피우기'와는 구별된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인 '폴리가미(polygamy)' 역시 서로의 관계가 오픈되어 있고 다자간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보면 '일부일처제'를 약속하고 몰래 바람을 피는 것보다 더 솔직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영화 <사랑의 시대>는 소유에 얽매이지 않은 '공동체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래 내용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아나운서인 여자 주인공은 남편과 미성년인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대저택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을 꿈꾸며 남편에게 이를 제안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의견을 받아들인 남편은 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바람을 피는데... 이를 알게 된 여자 주인공은 상간녀를 공동체 생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고 하였으나 결국 그녀는 이 같은 관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홀로 집을 떠나게 된다. 여주인공은 '사랑의 공유'는 받아들였으나 남편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상대 여자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남편이 두 여자에게 비슷한 정도로 사랑을 나누어주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반대로 이 같은 사랑의 형태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상상해본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도 있다. 누가봐도 완벽하고 멋진 여자 주인공은 두 남자와 각각 살림을 차리고 산다. 심지어 아이도 있는데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2008, 무려 10여 년 전 개봉한 영화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인데, 어쨌든 여주인공은 굉장히 행복해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의 속마음은 어떨까?

 

결혼 제도라는 게 '부계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났다는데, 자신의 아이가 내 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어머니보다 아이를 덜 보살피게 되므로(부성애는 아이가 자신의 친자라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녀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결혼 제도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사실 '결혼'이라는 건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어찌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욕구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자 소유욕(배우자와 자녀에 대한)의 완성을 위한 것일 수 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많은 이들이 다자간 사랑이 아닌 일대일의 관계를 택하는 것이다. 만약 자유로울 수 있다면 서로의 합의 하에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결혼이 가능할 것이다. 일부일처제를 택하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욕구보다 소유하지 못한 고통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결혼(일부일처제)'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결혼 전 서로 간의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 성격이나 취향을 맞춰보기 이전에 결혼에 대한 시각인 '결혼관'부터 맞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 가치관, 생활 방식, 자녀의 유무 등에서부터 인테리어 취향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구체적인 부분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결혼할 사람을 선택하기란 어떤 종류의 고통을 흔쾌히 견딜지 결정하는 일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히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차이를 수용할 수 있는)사람이다. 실제 관계는 매체들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거의 다 하자가 있고 불만족스럽다.

 

 

 

4. 결혼 이후의 일상

 

일단 '결혼'을 선택했다면 그 이후는 무조건적인 '노력'이다. '관계 유지를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기 전 우리는 '부모'라는 절대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결혼은 어찌보면 나의 원가족(결혼 이전의 가족) 형태의 재현과 극복이라고 볼 수 있다. 원가족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이 결혼 생활의 밑거름이 되는데, 자기 성찰 및 부부 간 조율이 잘 이루어진다면 원가족보다 더 이상적인 형태의 가족 형태를 이루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결혼 생활에 있어 특히 부부의 '성격'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것이 결혼 이후 평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격이 서로 잘 맞는다면 포기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 많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서로가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물론 완벽한 성격은 없으므로 결혼 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면밀히 구분하여 따져보는 게 현명하겠지만, 살아봐야 안다는 말처럼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한 사람의 희생과 포기로 원만해 보이는 부부들이 많은데, 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위험하다. 겉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여도 자신의 치명적인 성격적 단점을 극복하지 못한 배우자 때문에 상대 배우자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평생에 걸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을 바꾸고 서로 조율해나가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어찌보면 자신의 모난 부분들을 둥글려 나가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된다고들 하는데,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희생과 인내심을 길러 보다 성숙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노력'할 마음이 없다면 모두를 위해 혼자 사는 게 나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참을성 있게 이를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의 백미는 결혼 이후 생기는 문제들의 분석과 해결방법들을 제시한 데 있다.

 

부부 간 다툼의 원인은 가정에서의 일들이 바깥일에 비해 덜 중요하고 하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대충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샤워 후 샴푸 뚜껑을 닫지 않고 열어놓거나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하느냐 마느냐의 아주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에도 합의와 조율이 필요하다. 그것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서로에게 편리한 방식을 찾아내도록 협상에 협상을 거듭해야만 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부부 사이에 특히 필요한 것이 바로 '미적 거리(심리적 거리)'. 가깝다고 생각해서 서로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만 내세운다거나, 인정과 칭찬에 인색하고 비난을 일삼게 되다 보면 서로 상처가 쌓여갈 것이다. '편하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이'가 되려면 서로 불만이 있어도 대화로 잘 풀어나가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평생을 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나간다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낭만적 사랑의 시작과 그 이후에 대해 살펴봤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 그리고 대화'가 아닌가 싶다. 우선 자기를 버리고 무소유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본다면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해에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것, 닿지 않을 것 같은 꿈처럼 이상적이기에 '사랑'이란 주제는 늘 흥미롭다.

 


위 글은 브런치에서도 발행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artistnao/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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