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다

마음을 쓴다는 건

by artist_nao 2019. 2. 24.
반응형



세수를 하는 꿈을 꾸고 새벽에 깼는데, 문득

마음을 쓴다는 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연필 소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연필선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명암을 나타내야했는데, 그건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작업으로 인내심이 필요했다.

물론 수채화나 파스텔 같은 다른 재료들을 쓸 때도 마찬가지긴 했는데 그래도 알록달록한 색감을 쓰는 재미가 있는데다 화려한 색들로 시선을 잡아끌 수 있어 연필보다는 잔 기교를 부리기 쉬웠다.

대상의 형태를 잡고 차곡차곡 종이의 결이 다치지 않게 흑연을 쌓아올리는 작업에서 마음이 급한 나는 멈춰야할 때와 더 그려야할 때를 몰랐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흑연으로 떡칠이 되어버려서 맨들맨들하게 종잇결이 다 망가진 그림을 붙잡고 애를 태우곤 했다. 그 상황에선 연필선을 더 쌓을 수도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었다. 손을 대면 댈수록 그림은 더 망가졌으니까.

물론 학원에서 수없이 그렸던 그림들은 연습이었으니까 다시 새 화지를 받아 그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실전에선 단 한 장의 종이만 주어진다. 주어진 시간 내에 성공했던 연습을 떠올리며 그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그려내야만 한다.

연필 소묘는 보통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잘 그려냈던 것 같다. 난 항상 좀 급한 면이 있었고 결과를 빨리 보고자 하여 결과물은 늘 약간 과한 면이 있었다.

그게 비단 그림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대의 나는 너무 어렸고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받는 일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망가져 가는 그림을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감각적으로 빠르게 그려내는 스케치와 드로잉, 소품들을 좋아했고 시간과 끈기로 그려내야 하는 작업은 힘들어했다. 인간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웠다.

마음을 쓰는 일도 연습이 필요하다. 수없이 연습하고 실전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나와 상대의 관계, 그건 깨끗한 한 장의 도화지와 같아서 다시 제공되지 않는다. 지우개를 쓰는 건 한계가 있다. 많이 지울 수록 그림이 탁해지고 종이의 결이 다치기 때문이다. 애초에 충분한 계획과 연습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조심스럽게 그려나가는 게 최선이다.

나 혼자만의 일은 오로지 나만의 그림이기 때문에 그것의 성패는 순전히 나에게 달린 일이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림은 누구 하나의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함께 그려나가는 것이기에 두 사람 모두 충분한 연습이 바탕이 되어야 멋진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제는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다시 종이가 주어진다면 나는 잘 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붙들고 매일 난 울고만 있었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열심히 지우고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그려나갔었다. 감쪽같이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종이의 결은 다 망가져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건 나 혼자만의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갑자기 마구 그어져버린 새까만 크레파스 선을 보면서 도저히 그건 지울 수도 다시 고칠 수도 없기에 다시 또 울 수 밖에 없었다.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은 타이밍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들은 마음의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충분히 시행착오를 겪고 연습으로 다져진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멋진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힘든 일이다. 또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지나고 나니 아 그 때 그 사람은 나에게 마음을 많이 주었는데 난 알지 못했다거나, 지금의 나는 마음을 많이 쓰는데 상대가 그걸 몰라준다거나... 마음의 타이밍이 어긋나는 것처럼 힘들고 슬프고 아픈 일이 있을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