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제목에 혹해서 집어든 책이다. 독일의 현대 문학 작가 24인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이야기들이 동화적인 요소가 많았다. 딱 '동화'라고 말하긴 애매한 것이 어른들이 봐도 괜찮을, 아니 어른들이 봐야만 하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각 이야기들이 굉장히 개성이 강하고 소재나 구성이 독특했다.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짤막한 이야기들을 쏙쏙 골라서 읽을 수 있으니 알찬 뷔페식 상차림같기도 하다.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몇 편 고르자면 우선 강렬하게 첫 장에 등장했던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 와 두번째 동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용을 죽인 사나이> 등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작가나 철학가도 있고 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글도 있었다.
사실 글자 하나 없는 이미지로만 구성된 카드 뉴스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장편의 글을 읽는 게 쉽진 않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환상 동화집은 잠자기 전 몇 분 짬을 내어 한 두편 읽기 좋은 굉장히 부담이 적은 책이다.
동화의 특성상 등장 인물들과 사건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따라가고 이야기가 끝나면 '응, 뭐지?' 하며 적잖이 당황스러워하다가 다음 날 생각해보면 '아! 그런 내용이었구나. 그런 뜻이 있었구나~!' 하고 탁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1
첫 동화였던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는 법에 이르는 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등장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한 남자는 이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문지기는 이 문을 통과하더라도 여러 개의 문과 문지기가 있으며 점점 힘이 세지는 문지기들로 인해 들어가기 힘들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남자는 입장 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문지기를 피곤하게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면서 그를 매수하기 위해 힘쓴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점점 늙어가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문지기에게 모두들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데 그동안 왜 아무도 입장하길 원하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문지기는 말한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입장을 허가받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이 문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니까요. 나는 이제 문을 닫아야겠군요.
남자는 문 안쪽의 그 '무엇'에 이르길 갈구하면서도 평생을 문 앞에서 서성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카프카가 '법'이라고 표현한 그것은 사회 제도나 관습, 이념 또는 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일수도 있을 것이다. 문지기는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엔 가능할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이 문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더 어려운 관문들이 남아있을거라며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던져준다. 남자는 평생을 이 문지기의 눈치만 보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다. 그러나 그가 죽기 직전 문지기는 이 문이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라 단언한다. 남자는 자신의 문을 자신의 의지대로 열지 못했던 것이다. 내 인생을 스스로 열지 못하고 타인이 열어주길 기댄 결과는 죽음 뿐이었다. 문지기에게 얻어 맞더라도, 설령 법에 이를 수 없을지라도 용기를 냈더라면 그리 허망하게 삶이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살아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거대한 문과 마주하게 된다. 눈에 빤히 보이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 권력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 놓은 단단한 철문 앞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고 때로는 그들에 편승해나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이건 아니라고 자각하기도 하나, 어떤 이는 그것이 평생을 문 앞에서 서성이다 끝날 길임을 알지 못한다. 문을 향해 한 발짝이라도 나아간다면 그 문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게 옳은 길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좁게 보자면 이 문은 개인이 지닌 선입견, 편견일수도 있다. 내 자신에 대한 규정, 타인에 대한 편견, 어떤 대상에 대한 선입견.. 이러한 문들을 깨지 못한다면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맴돌다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설사 문 안쪽의 그 '무엇'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내는 것, 한 발짝 내딛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 삶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
문지기 앞에 스러져가던 남자의 비극이 떠오를 때마다 다시 한 번 내 삶의 고삐를 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두번째 이야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용을 죽인 사나이>는 얼핏 보면 여느 동화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어느 나라에 왕과 그의 아름다운 딸, 공주가 있고 그 마을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인 용이 산다. 영웅심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이 용을 정복하려다 수없이 죽어나가자 흔한 동화이야기처럼 왕은 자신의 딸을 내건다. 독특한 건 이 공주는 지금까지 나라를 슬픔으로 몰아넣은 이 괴물이 죽기를 기도했었지만, 그녀의 운명이 미지의 한 젊은이(용을 무찌르고 그녀를 차지하게 될)에게 주어지자 은근히 그를 제지할 용을 응원하게 된다. 그러다 한 영웅이 용을 해치웠다는 소문을 듣게 되고 부상으로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를 그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녀는 숲에서 망신창이가 된 영웅을 발견하고 그의 소유물이 될 자신을 묵묵히 단장한다. 그러나 이 젊은 영웅은 이미 이 나라에서 벗어나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의 행동에 대한 포상을 기억시켜주었더라면 그는 웃으면서 돌아섰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포상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 용을 무찔렀을 흔한 동화 스토리와는 달리 '용을 죽인 사나이'는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을 무찌르는 그 행위 자체에 몰입해있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포상마저 잊어버리고 온전히 자신의 목적에 심취했었던 그에게 이미 그 포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끔 어떤 목적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고 불안해하며 긴장 속에 살아간다. 정작 지금 내 자신의 행위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또한 그 목적 역시 어떤 것을 '소유'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개인의 성공, 많은 재산, 업적 등 날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줄 그 '무엇'을 '가지고자 한다'. 우리는 익히 경험을 통해 소유물은 더 큰 소유욕을 부를 뿐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끌어내지 못함을 안다. 그러나 지금껏 갖지 못한 엄청난 소유물은 나를 확실히 행복하게 해줄거라 믿는다.
내면의 열정을 지닌 젊은 '영웅'은 '소유'하고자 함이 아닌 '존재'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포상을 잊었으리라.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오롯이 '존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3
위 둘의 동화와 일맥상통한 의미를 지닌 이야기들도 있었다. '에트빈 회른레'의 <카멜레온> 에서 카멜레온은 사냥꾼에게 맞서는 표범을 탓하며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적응해 색을 바꾸는 자신을 뻐긴다. 결국 표범은 사냥꾼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그들을 때려 눕히고 자유를 찾았으나, 카멜레온은 그들에게 붙잡혀 노리갯감으로 전락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에 무리하게 힘을 쓰다가 죽고 만다. 죽음을 맞이한 '카멜레온'은 '법 앞에서' 죽어갔던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토마스 테오도르 하이네'의 <파란 꽃> 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 남자가 꿈 속에서 희귀한 모양을 띤 '파란 꽃'을 보게 되고 이것을 찾아 전 세계 곳곳을 헤매게 된다. 그의 소홀에 회사는 점점 어려워지고 그는 늙어갔다. 결국 회사는 망하고 파산한 그는 고향에 돌아왔고, 한 때 그의 밑에서 일하던 남자의 집에 초대받게 된다. 그 집은 주인공이 근로자들을 위해 지었던 근로자 주택이었는데, 그는 바로 이 집의 작은 정원에서 평생을 애타게 찾았던 '파란 꽃'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동화 <파랑새>와 너무도 유사하다. 차이점이라면 <파랑새>의 주인공인 아이들은 꿈 속에서 파랑새를 찾아 헤매다 깨어났지만, <파란 꽃>의 주인공은 평생을 파란 꽃을 찾아 허비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파랑새와 같은 의미를 지닌 '파란 꽃'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행복과 만족을 의미한다. 용을 죽인 사나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대비된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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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동화>에는 이 밖에도 여러 편의 동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소 허무맹랑하고 우리네 정서에는 생소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전편이 모두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주거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짧지만 강렬하게 전달되는 그 의미들이 가끔씩은 인생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위 글은 브런치에서도 발행되었습니다.
https://brunch.co.kr/@artistna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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