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고타 크리스토프/ 연습과 훈련

by artist_nao 2018. 10. 18.
반응형

'아고타 크리스토프', 밀란 쿤데라와 비교되는 작가라고 하는데 비교라기 보단 '대조'라고 해야 맞는 듯하다. 밀란 쿤데라의 글은 운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글은 산문 느낌이다. 비유와 상징, 은유들이 형형색색으로 다채롭게 날아다니는 전자와 달리, 후자의 글은 차다찬 단검같이 짧고 날카롭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총 3부로 나뉜다.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

- 아래 내용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글은 굉장히 빨리 술술 읽힌다. 특히 1부는 주인공이 어릴 적에 쓴 글이라 그런지 2, 3부에 비해 문장이 어색할만큼 짧다. 쌍둥이 형제인 '우리'가 보고 겪은 일들이 감정없이 묘사되고 있다. 피폐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들은 각종 혹독한 연습을 한다. 야생에 던져진 것처럼 가정과 사회의 교육을 일체 받지 못한 그들. '우리'의 성장은 오로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아래에서도 쌍둥이 형제는 그들 나름대로의 '선'에 따라 중심을 잡아 나간다. 글 중간 중간 살인이나 성적 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장면들이 있어 더욱 빨리(?) 읽힌다. 잔인하고 더럽고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너무나 당연하듯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실제 전시 상황을 겪었던 작가에게 이러한 환경은 현실, 실제 그 자체였을테니까. 그러나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대부분의 내용이 환상으로 느껴질 것이다. 

2부. 1부에 비해 전개가 약간 답답할 수 있다. 1부에서 쌍둥이 형제는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그 중 하나인 루카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국경을 넘어가 소식이 끊긴 클라우스를 항상 그리워하며 양자인 마티아스를 애지중지 키운다. 2부는 주인공보다는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불구이지만 영특했던 마티아스는 양아버지인 루카스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그는 금서를 읽기 위해 클라라에게 접근하느라 바쁘다. 그의 부재로 결국 마티아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루카스는 끔찍히 아들을 사랑했지만 마티아스는 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루카스와 클라라도 어딘가 어긋나 있다. 클라라는 남편의 죽음 이후부터 삶이 정지된 듯하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억울한 죽음이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할머지가 될때까지 그녀를 괴롭힌다. 

2부에서 가장 돋보인 캐릭터는 단연 빅토르. 서점 주인인 그는 루카스에게 서점과 집을 팔고 누나가 있는 도시로 떠난다. 그의 건강과 안위를 항상 생각하고 그를 챙겨주는 누나 밑에서 평생 원이었던 책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올가미처럼 옭아매어 두 사람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이 밖에 루카스를 (흑심으로?) 챙겨주는 당 간부인 페테르, 매일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불면증 노인... 등장인물들을 다들 비뚤어져 있고, 어딘가 망가져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떤 한 두가지에 매달려 있고, 그것 때문에 살고 또 그것 때문에 죽는다. 

3부. 쌍둥이의 재회. 비극적인 만남. 3부의 제목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케 한다. 잘못된 시작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부엔디아 가문. 돼지꼬리의 비극. 쌍둥이의 비극은 아버지의 바람에서 시작된다. 다른 여자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고, 그것을 안 아내는 아버지를 죽이고 쌍둥이 중 한 명을 불구로 만들 뻔 했다. 한 아이는 아버지의 여자와 같이 살게 되었고, 다른 아이는 양육 시설에 보내졌다. 양육 시설에 보내진 루카스는 산전 수전을 겪고, 할머니 집에 보내져 국경을 건넜고, 클라우스는 아버지의 여자와 살다가 친어머니에게 돌아가 그녀와 함께 살았다. 루카스는 평생을 클라우스를 그리워했고, 클라우스 역시 그러했으나 루카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했다.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게 됐지만 루카스는 자살을 선택하고, 클라우스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상당한 두꺼운 책이지만 하루 반나절 만에 쓱 읽힌 소설. 작가는 글을 완성한 후 허탈감을 느꼈다는데 나 역시 그러했다.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가지는 3부작을 상징한다고 보면 '거짓말', 이게 남는다. 존재의 거짓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선, 진리, 깨달음, 그 '참'의 이면에는 '거짓말'이 있겠지. 원래 소설은 비극이다. 희극인 소설은 없다. 있다면 비극을 승화시킨 희극이겠지. 소설은 이야기이고 말이 많아지다보면 생각도 많아지고 작가 자신의 사회적 배경, 트라우마 그런 것들이 다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잘 엮여져 나오면 명작이 되는 것이고. 

어쨌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너무 슬퍼서. 다른 작품도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등장 인물들은 하나 같이 절뚝거리고 극복해보려 해도 몸부림치다 거세당한다. 그냥 사는 동안은 각자 나름대로의 목표나 욕구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불쌍한 인생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 잘못이 과연 그 사람의 것인지. 아니 오히려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 의한 것이다. 환경에 지배당한다면 개인의 의지는 의미가 없는 건가. 

1부에서 쌍둥이들은 훈련을 한다. 할머니의 학대와 동네 아이들의 폭력에 견디기 위해 둘은 서로를 때리며 단련한다. 정신도 육체도 강해지는 연습을 한다. 견디는 연습을 한다. 그래서 루카스는 살아남았고 클라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났을지라도.


살아간다는 건 재미없고 지루하고 힘든 연습을 해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소소하게 행복할 때도 있고. 

지금은 하지 않지만,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잠들기 전에 항상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렸었다. 따뜻하고 사랑받는 느낌. 그렇게 그 이미지에 마음을 기댄 후에야 잠이 들었다. 자주 식은땀을 흘리고 가위에 눌리고 이불을 돌돌 싸매고 무엇이 날 그토록 불안하고 무섭게 만들었는지.. 커 가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나가고 반복하다보니 괜찮아졌다. 

또 살아나가면서 새로운 힘듦과 고통에 봉착했을 때도 역시 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리석게도 그걸 망각하고 고통의 늪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고 울기만 한 적도 있었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강인하고 생존력이 있다. 


(발췌)

1부. 비밀 노트 

p.27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거야... 영원히.. 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p.35

 우리는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p.46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한참을 그렇게 연습을 거듭하고 나니 이제 삼각 숄로 눈을 가지거나, 풀 뭉치로 귀를 막지 않아도 된다. 장님 역은 단지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면 그만이고, 귀머거리 역은 온갖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2부. 타인의 증거

p.205

"넌 슬퍼해야 할 일이 없겠구나?"

"네, 그래요. 저는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마음을 달래거든요."

p.337

 이곳, 누나가 청소며 빨래며 식사를 모두 마련해주고, 살림을 맡아주는 이곳에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항상 쓰고 싶어하던 책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상상했던 평화롭고 한가한 생활은 너무 빨리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누나는 나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감시했다. 누나는 내가 도착하는 즉시, 내게 술과 담배를 금지시켰고, 쇼핑이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나를 다정하게 포옹했지만, 그것은 단지 내게서 술이나 담배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려는 행동임을 나는 알고 있다. ...

p.338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p.352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는 건가? 사회는, 나를 살려두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시체 한 구 대신에 한 권이나 또는 여러 권의 책을 얻게 될텐데.

3부. 50년간의 고독

p.545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p.560

 작가의 말 中

 작품을 끝냈을 때의 기분은 허탈했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 책 표지 디자인 누가 했는지 센스 작렬이다. 에곤 쉴레 그림이 책의 느낌을 잘 담아내고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