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쓰는 일기.
어제 우리 떡순이 4개월 예방 접종을 하고 왔는데 초저녁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1차 접종 때 미열만 있었던 터라 접종열은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열체크를 해보니 최고 38.4도.
너무 놀라서 아빠께 약국에서 해열제 좀 사다 달라고 sos를 한 뒤 엄마랑 물수건으로 닦고 옷도 갈아입히고 계속 지켜보았다. 이 와중에 우리 애기는 물수건이 닿으니 차가운지 깜짝 놀라서 끙끙 으으 소리를 내는데 그게 넘 귀여웠다 ㅜㅜ 열이 쉬이 내리지 않으니 점점 걱정이 깊어졌는데 아빠가 약을 들고 집에 오셔서 얼른 해열제를 먹이니 1시간 만에 열이 내려 늦은 밤 겨우 잠이 들었다. 진짜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밤새 엄마랑 교대해서 아기 옆에 누워 쪽잠을 자고 물수건을 갈아준 공을 알아준건지 그래도 간밤에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이 좋아보였는데, 오늘 다시 미열이 있었다. 그래도 38도는 넘지 않아서 물수건만 계속 갈아주고 재우고 해서 누워있는 아기 옆에서 일기를 써본다.
아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책임감이 느껴진다. 나보다 아기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삶이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밥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 자는 것 정말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진다. 밥 차리거나 먹다가 잠에서 깬 아기 재우러 들어가는 건 부지기수.. 한 끼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아기 안고 화장실을 가기도 하고 밤에 자주 깨는 아기를 재워야 하니 3-4시간 이상 이어서 자본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이런 삶이 앞으로 몇 년은 지속될 것이다.
일이 너무 바쁜 남편 때문에 독박 육아는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힘드니까 이래서 요즘 사람들은 많이들 애 없는 싱글이나 딩크로 사는 구나 싶기도 하고. 애를 낳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간 답게 살고 싶으면 조부모가 쭉 봐줄 수 있는 환경이거나 부부 모두 시간이 널널한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아님 돈으로 사람을 사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등등 뭐라도 믿을 구석이 있어야 되는 것 같다. 많은 부분이 돈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남편은 돈으로 사람을 구하라지만 요즘같이 코로나 전염병이 도는 시국에 돈으로 안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알았겠지. 어쨌거나 친정에 내려와서 당분간 얹혀 있을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다. 더군다나 나름 코로나 청정 지역이라는 제주에서.
집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정말 너무나도 멋지다. 20년 만에 새 집으로 이사해서 그림같은 집에서 사신지 일 년도 안됐는데 딸래미가 갓난 아기 데리고 내려와서 바닥에는 매트, 모빌부터 바운서, 장난감들을 막 늘어놓고 정말 휑할 정도로 깨끗했던 테이블에는 유축기부터 젖병소독기, 각종 육아서 들을 쭉 나열해놓으니 정말 어처구니 없으셨을 거다.
서울에서 한 달 반을 도와주시고 얼마 쉬지도 못하셨는데 다시 육아에 동참하신 엄마께 특히 넘 죄송한 마음... 그래두 엄마 아빠가 첫 손자를 정말 귀여워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엄마는 아빠랑 가까운 오름에 한번씩 운동을 다녀오시는데 오늘은 야생 달래를 조금 캐오셨다. 나도 바깥 바람 쐬고 싶고 부모님도 아기 봐주실테니 나갔다 오라고 하시지만 애엄마라 그런가 아기 떼놓고 나가서 한 시간이 넘어가면 불안해진다. 젖뭉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사지 받으러 몇 번 나갔었는데 마사지 받는 중간에도 우리 아기 걱정에 안절부절했어서 끝나자마자 급하게 들어오기도 했었다. 날씨 따뜻해지면 유모차 끌고 집 앞 산책로 살짝 마실 다녀올 생각이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아기,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다. 너무너무 힘들 때는 이 마음을 살짝 잊을 때도 있지만 어제 오늘 처럼 열이 있고 아파할 땐 평소 건강한 것에 정말 감사해야 되는데 싶다.
우리 아기를 위해서 나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잘 유지해야할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과 지금 이 소중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게 보내야겠다. 항상 생각해보면 해서 후회한 것보다 더 하지 못해서 후회한 게 대부분이었는데, 요즘 들어 생각해보면 난임으로 일을 몇 년 쉬다시피 했는데 지난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 공부한다고 어영부영 보내기도 했고 이것저것 배우긴 했는데 뭐 하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것도 없었다. 그래도 당시엔 나름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생각해보면 좀 더 요리를 자주 하고 미싱을 더 배워둘 걸 싶고, 어렵긴 했지만 재즈 피아노도 중간에 관두지 말고 계속 배울 걸. 그런 마음도 들고.
아기 돌 지나 어린이집 보내도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되기 때문에 앞으로 여유있게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몇 년 간은 힘들 것 같다. 그나마 임신 때 조산기로 누워지내면서 사부작 사부작 했던 손바느질이나 뜨개질이 마지막 호사였다는 생각이 ㅜㅜ
일단 체력 좀 먼저 기르고 떡순이도 좀 통잠을 자주면 저녁에 육퇴하고 미싱을 돌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계속 간만 보고 있다. 물론 여기 친정집에 있을 동안만 가능할 일이다. (그것도 아마 이유식 하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면 애 없을 때 아기 갖는답시고 탱자탱자 놀던 나를 소환해서 좀 부려먹고 싶다 ㅋㅋ 밤에 애 재우는 것만 교대 좀 해줬으면 좋겠다. 젖병이랑 쪽쪽이 좀 닦으라고 해도 되고.
일기가 쓸데없이 넘 길어졌다. 이제 필요한 물건들 주문 좀 하고 뭐라도 하든지 잠을 좀 자놔야될 것 같다.
'나오의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 17일 (금) 확실히 사주 일진이라는 게 있나보다 (0) | 2020.04.17 |
---|---|
4월 11일 (토) 임신, 출산과 육아는 여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갈아넣는 일 (1) | 2020.04.11 |
1월 20일 (월) Lost Stars / 나의 어린 양 (0) | 2020.01.20 |
9월 23일 (월) 기해년 계유월 계해일/ 수기운이 밀려온 날 (0) | 2019.09.24 |
9월 17일 (화) 집순이로 지내기 (0) | 2019.09.18 |
댓글